2025년 1월 13일 아침을 두 번 맞았다. 인천공항에서 아침 해를 보면서 떠나 13시간을 날아 왔는데 보스턴 공항에서 또다시 13일 아침 해를 마주한 것이다. 탑승한 후 한 숨 잤을 뿐인데 태평양 건너 지구 반대편에 나를 데려다주는 비행기라는 문명 모빌리티에 또한번 놀란다. 동시에 날짜와 시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 깨닫는다.
1989년 내가 해외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 이곳 보스턴이다. 하바드 엔칭연구소에 있는 동안 탈냉전 선언과 독일통일 소식을 접했고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학자들의 우려를 가까이서 보았다. 내 학문적 자산의 한부분이 형성되고 좋은 연구자들과의 인연이 맺어진 곳이기도 하다. 한달 전 타계한 카터 에커트 교수는 잠시 자신의 아파트에 내가 기거할 수 있게 해 줄 정도로 여러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곳 마운트 어번 묘지에 잠들어 있는 낸시 교수는 한국의 세대와 계층, 사회운동 연구에 큰 성과를 낸 탁월한 학자이면서도 늘 나를 지적 멘토처럼 여기며 한국학계를 존중한 분이셨다.
이번은 이전까지와는 달라 더이상 학술적 방문이 아니다. 대학이나 연구소를 찾을 계획도 없고 특별히 지적 대화를 나눌 상대나 계기를 애써 마련하지도 않았다. 내 여행 가방은 손녀들에게 줄 한글동화책과 과자봉지로 가득 채워졌고 대부분의 시간을 딸과 손녀를 위해 쓸 마음의 각오도 충분하다. 손녀가 다닐 초등학교와 동네 도서관을 함께 가거나 좋아하는 옷이나 장난감을 사주면서 인기를 얻는데 최대의 노력을 할 생각이다. 딸과 사위가 근무하는 회사 상황과 출석하는 교회공동체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하면서 과거에 나누지 못한 정을 되살리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으려 한다.
한국을 떠난지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한국뉴스로부터 멀어진다는 느낌이 확연하다. 한편의 궁금함과 또한편의 회피심리가 뒤섞여 마음은 염려와 무심의 이상한 조합상태다. 주요 현안들이 어떻게 전개될지 초조한 바 없을 리 없지만 그렇다고 애써 뉴스를 뒤지고 조바심을 내지는 않을 작정이다. 이런 저런 주장들이 내 정서와 의식을 마냥 흔들지 못하도록 현실을 긴 호흡으로 직시하고 냉정한 거리감을 키우는 기회로 삼아볼까 한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을 코앞에 둔 시점이라 이곳에서도 뉴스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현 한국상황을 트럼프 신정부가 어떻게 평가할지 어떤 요구를 내놓을지, 미국의 새 정책기조에 한국은 얼마나 지혜롭고 효율적인 대응책을 마련할지 따라올 걱정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정파적 이익투쟁과 내부의 정치동학을 넘어 불확실성이 커지는 국제환경에 대응할 집단적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때다. 위기 속에서 미래의 복합 충격을 감당할 역량이 성장하는, 대전환의 역설적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