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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미학 1

그리스 아테네를 둘러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먼 옛날 그들이 보여준 조형미의 아름다움은 대단했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의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위용을 접했을 때 느낀 감동은 말로 하기 어렵다. 사진으로 본 바와 다를 바 없고 원형도 많이 훼손된 상태인데도 가히 건축미학의 최고경지라 일컬을만 하다는 생각을 했다.중국의 만리장성이 놀랍고 경이로우며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장대하지만 이런 미학을 표현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고고학 박물관에서 만난 조각품에서 그리스인들의 미학을 좀더 가까이 느꼈던 것 같다. 조각품의 섬세한 기법은 물론이고 인체의 아름다움을 놀랍도록 표현한 예술적 감각이 가히 압권이다. 인간이 추한 면모도 적지 않지만 만물 중 인간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리스 조각의 최고품들은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의 박물관에 가 있다고 한다. 온전하지 못하거나 수준이 다소 떨어지는 작품일지라도 아테네 현장에서 직접 만나는 유물이 풍기는 아우라는 남다르다.

르네상스는 이런 그리스 미학을 부흥시키려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카톨릭 하의 중세 유럽은 영혼을 중시하고 육체를 경시하는 엄숙주의가 강했다. 그리스 예술은 육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인간의 욕망을 승인함으로써 중세 암흑기를 해체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나 대영제국 박물관에서 그리스 조각작품을 최고의 소장품으로 전시하는 것도 이런 르네상스 미학에 대한 공감과 무관치 않으리라. 약소국 유물의 약탈이라는 제국주의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만 서구문명의 계승자로 자처하고픈 그들 욕망의 소산인 셈이다.

그리스 조각은 인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많다. 남성의 경우는 용맹함과 근육질의 신체, 역동적인 움직임 등이 작품 속에 반영되어 있다. 통상 다산과 풍요의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하던 여타 문화권과는 다르게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을 극단적으로 추구했다. 특히 여성은 우아한 얼굴과 균형잡힌 몸매, 신비로운 곡선미가 유난히 돋보인다. 개인적 느낌으로 요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느끼는 바지만 하나님이 여성을 남성보다 더 정교하게 빚으신 것 아닐까 생각할 정도다.

어릴 적 도덕론이 우세한 환경에서 성장한 탓에 외모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은 내겐 낯설었다. 유교적 가풍과 기독교적 가르침이 독특하게 혼합되어 의복, 치장, 춤, 음식 등에 대한 무관심이 몸에 배었다. 하지만 성장해 가면서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도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영육 이원론을 넘어서 아름다움, 감성, 충동, 축제, 욕망 등의 가치를 새롭게 느끼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경험한 일종의 내 의식의 르네상스였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리스 고고학 박물관에서 만난 많은 작품들이 주는 감흥이 남달랐다. 그 중에서도 고개를 들고 무릎을 꿇은 상반신 여인상은 정말 인상 깊었다. 아름다움과 우수가 함께 뭍어나는 그 작품을 앞뒤로 오가며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중앙 홀에 서있는 아프로디테의 상은 놀라운 균형미와 곡선미로 내 눈을 끌었다. 이들 작품은 오늘 현대의 작가들도 쉽게 따라가기 어려운 명실상부 최고의 수준이다. 누군지 모르는 그 시대 조각가들의 손과 마음을 떠올리며 나도 도화지에 선을 그리며 음영을 넣었다. 미학은 이렇게 시대를 넘어 교감할 수 있는 것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