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이었다. 숭고한 정신과 아픈 역사, 그리고 탁월한 건축양식이 함께 빚는 숙연한 아름다움 – 서소문 성지역사박물관을 돌아보면서 받은 인상이다. 떠들석한 말과 번잡한 물증 없이도 인생과 역사, 정치와 종교, 서구와 동양, 삶과 죽음의 관계를 묵상하게 만드는 종교적 학습장이다. 어두움과 빛, 직선과 곡선, 절제된 구성에서 성스러움을 실감하는 체험장이기도 하다.
이곳은 원래 조선시대 죄인들을 처형하던 장소인데 특히 많은 천주교도들이 순교의 피를 뿌린 곳이다. 그 아픔을 망각하지 않고 내면의 성찰로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이런 공간을 서울의 한복판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고마왔다.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뮤지엄을 들렀을 때, 또 뉴욕 그라운드 제로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받았던, 장중하면서도 슬픈 다크 투어리즘의 미학을 느끼게 한다. 특히 지하의 어두움과 지상의 밝음이 다양한 방식으로 교차되고 대비되는 절묘한 구성이 감동적이었다.
공원 입구 기념탑에는 성인과 순교자들의 명단과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라는 중앙 석판이 새겨져 있다. 공원의 한 구석 벤치에는 ‘노숙자 예수’란 청동상이 누워있다. 티모시 슈말츠라는 작가의 작품이란 설명문을 보지 못하면 실제로 한 사람이 공원에서 노숙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만하다. 청동상이든 노숙자든 오가는 사람들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다. 강도만난 사람을 두고 지나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태도가 오늘날 도시의 바쁜 사람들의 자세와 얼마나 다르겠는가 작가가 묻는 듯 하지만 그 어떤 명시적 메시지도 생략되어 있다.
카톨릭이 서학의 이름으로 전래된 과정을 보여주는 지하의 전시실 역시 절제되어 있다. 유학이 지배하던 조선후기 사회 곳곳에 새로운 사상이 전파되고 생겨나는 흐름을 당대의 전적과 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서학은 물론이고 실학과 동학, 개화사상이 그 흐름 속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이 눈에 띤다. 기독교의 종교적 측면에 한정하지 않고 그 정신이 지니는 세계문명사적 함의를 역사적 맥락 속에 자리매김하려는 의도가 고급스럽고 반가왔다. 그래서일까 한쪽 벽면에 걸린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안중근의 유묵, ‘평화’가 더욱 묵직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지하 3층의 콘솔레이션 홀은 역사 속에서 희생당한 자들을 추모하고 현실에서 지친 인생을 위로하는 곳이라 한다. 공간 전체를 채우는 짙은 어두움 속에 은은한 빛이 비치는 제단이 있어 누구든 무릎을 꿇고 싶은 경건함을 느끼게 한다. 실제로 그 제단 옆에 무릎을 꿇은 한 참배객의 굽은 어깨가 한폭의 성화 같은 실루엣을 만들고 있다. 고개를 돌리면 하늘광장이라 이름한, 위로 뚫린 광장에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지키러다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리는 조형물이 서있고 그 옆 좁은 문을 열면 순례길을 연상케 하는 어두운 회랑 끝에 별같은 빛이 손짓하고 있다. 누군가를 추념하는 장소라기보다 스스로를 위로하고 치유받는 공간이란 생각이 든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방문과 한국순교자 124위의 시복을 기념하기 위해 김경자 작가가 제작한 ‘일어나 비추어라’라는 제목의 나전칠기 작품도 눈이 갔다. 과거, 현재, 미래의 세 부분으로 좁게는 카톨릭 이백년사를 넓게는 한국 근현대사를 그리고 있는데 동양의 예술적 상징과 기독교적 성서관이 아름답게 혼융되어 있다. 십장생도의 미학과 불화의 분위기, 무릉도원에의 꿈도 있고 몽둥이와 칼을 든 사람들,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사람들, 예수를 품에 안은 피에타상도 있고 각국의 국기들도 있다. 일견 복잡해 보이는 이 모든 상징물들이 희생과 수난을 거쳐 모든이의 평화를 이루는 미래에의 도정을 드러내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기능적 효율성이나 과욕의 메시지 전달, 다수 대중의 이목끌기에 급급한 현대사회에 이런 절제된 공간미학을 구현하고 만들어가는 카톨릭의 문화역량에 깊은 존경의 뜻을 표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