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ST에 와 있는 기간동안 강의가 없는 시간을 이용해서 남도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다녀보고 싶었지만 좀처럼 짬을 내지 못한 곳이 적지 않은데 광주를 거점으로 오갈 수 있으니 비교적 수월하게 길을 나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오늘 그 첫 장소로 담양의 소쇄원을 택했는데 약 30분이면 갈 수 있다는 후배교수의 조언이었다. 실제로 주중이어서 길은 크게 붐비지 않았고 소쇄원을 찾은 방문객도 많지 않아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소쇄원(瀟灑園)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지은 별서정원이다. 소쇄라는 말은 ‘밝고 깨끗하다’는 뜻인데 자연미와 구도 면에서 조선시대 정원 중에서 첫손으로 꼽힌다. 1983년 7월 사적 제304호로 지정되었고, 2008년 5월에 명승 제40호로 변경되었다. 조선 중기 호남 사림문화를 이끈 인물들, 예컨대 면앙 송순, 하서 김인후,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이 이곳에서 교유하며 정치, 학문, 시를 논했다.
울창한 대숲을 배후로 하고 작지만 아름다운 계곡을 굽어보며 중앙에 ‘光風閣’이란 현판이 걸린 정자가 서 있다. 꾸미지 않은 담백한 모습이 주위와 잘 어울려 마치 원래부터 있던 자연물처럼 느껴진다. 왜 저런 이름이 붙여졌을까 생각하다가 내가 국민학교 시절 매일 오가던 금호강변에도 ‘光風樓’라는 2층 누각이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조선 태종 12년(1412)에 처음 짓고 선화루라 이름 지었던 것을 성종 25년(1494)에 당시 안의 현감 정여창이 광풍루라고 이름을 바꾼 곳이다. 광풍각과 광풍루 – 어린 시절 고향의 기억을 남도여행 첫 날 담양에서 떠올리게 된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광풍(光風)은 ‘비가 갠 뒤에 맑은 햇살과 함께 부는 상쾌하고 시원한 바람’이란 뜻이다. 과연 두 곳 모두 그런 곳이어서 이름과 실제가 잘 어울린다. 하지만 저 이름 속에 그런 뜻만 담겨 있었을까는 의문이다. 스승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후 향리로 내려온 양산보는 은거하는 선비의 삶에 더 이상 조정 권력다툼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 말기를 바라는 심정을 저 현판에 담고싶지 않았을까. 강직한 성품에 김종직 문하였던 정여창이 선화루를 광풍루로 바꿔 부른 것도 장차 무오사화가 일어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자신도 연루되어 유배될 것을 예감한 탓일지 모르겠다는 과한 상상까지 해보게 된다.
상쾌한 光風을 바랬는데 성난 狂風을 만나는 역경을 양산보도 정여창도 겪었다. 그런 인생사 아이러니는 지금 우리도 종종 접하지만, 자연은 그때나 오늘이나 멋과 여유를 잃지 않는게 중요하다고 교훈하는 듯 하다. 소쇄나 광풍의 뜻에는 그렇게 살리라 다짐하는 사림 처사 특유의 결기가 담겨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하며 21세기 오늘 내 삶도 되돌아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