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 시공간 여행

타산지석의 역사인식

오래 전 예정했던 일본 하기 지역 답사여행을 12월 9-12일에 마무리했다. 복잡한 과거나 논란은 일단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는 말로 괄호쳐두자. 대신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 유적을 관광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자‘ – 답사 여행을 계획했을 때부터 생각하고 다짐했던 바다. 함께 한 분들 모두 사려깊고 넓은 시야를 지닌 동학들이고 답사지역도 잘 선정되어 뜻깊고 즐거운 여정이 되었다.

하기, 시모노세키, 야마구치 등 지방도시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오가는 길이 너무 좁다고 느껴질 정도로 자연의 산세와 풍경은 별로 훼손되거나 변형되지 않은 듯했다. 시멘트 빌딩은 거의 보이지 않고 일본식 기와집 위주의 농촌 풍경이 전통의 강인한 존속력을 보여주는 듯 했다. 수백년 동안 이 지역을 통치했던 영주 가문의 집과 유적이 그대로 유지되고 이들을 기리는 신사와 사찰이 방대한 면적 그대로 보존되어 있음이 놀라왔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 곳조차 예상보다 아름다운 단풍과 이끼낀 바위, 고즈녁한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유적지마다 공간배치와 건축양식이 다르고 시대적 역할과 성격이 뚜렷해 현장에서 배우는 맛이 있었다.

하기박물관과 메이린학사는 일본 역사교육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문화학습장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국가사, 지방사, 세계사와 자연사를 한데 결합시키려 한 전시구성이 와 닿았다. 특히 하기박물관은 규모가 크지 않지만 깔끔하게 디자인된 공간구성과 알찬 내용이 좋았고 19세기 후반 격동기를 내우외환 – 흑선도래 – 구미열강 – 개국 – 공무합체 – 존왕양이 – 토막 – 명치유신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소용돌이로 그려놓은 도해가 시선을 끌었다. ’내우외환‘에서 시작하여 ’존왕양이‘를 거쳐 ’토막유신‘으로 이어지는 과정과 각 단계에서 작동하는 안과 밖, 수구와 개혁, 국가와 세계의 역동성을 종합적으로 드러내려는 내공이 만만찮게 느껴졌다.

장소마다 풍기는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하비에르 기념성당과 크리스쳔 순교기념공원은 고결한 삶을 추구했던 사람들의 눈물섞인 수난을 전하는 숙연한 공간이었다. 자발성과 희생, 종교성과 비극성에서 비롯하는 숭고함이 전해지는 듯 했다. 그에 반해 요시다 쇼인을 추모하는 쇼카순주쿠 일대에서는 메이지 국가주의를 부르짖은 주역들에 대한 영웅화의 시도가 역력했다. 어떤 공간보다 정치적인 그림자가 짙게 어른거려 실망스러웠다. 하기의 상징으로 요시다 쇼인을 내세우려는 지방적 이해관계로 치부하기에는 최근 일본의 전반적 역사인식 기조를 반영하는 흐름으로 느껴졌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삼삼오오 관람자들을 대상으로 자랑스럽게 이곳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기특한 역사교육이라는 느낌보다 정교한 정치교육의 기제를 보는 듯 해서 적지 않이 불편했다.

생각처럼 가볍게 여행하는게 쉽지는 않았다. 깔끔하고 아름다운 모리가의 정원을 바라보면서 임진왜란과 끌려온 도공의 애환, 조선침략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슌판로 기념관에서 ’청은 조선의 자주독립국임을 승인하고..‘라는 청일강화조약문 1조의 실물을 보는 순간 1894년 한반도 안팎의 갈등과 위기가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다.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중요한 국제적 논의 현장에 정작 우리는 참여하지도 못하는 비극이 1943년의 카이로 회담,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회담, 1953년의 정전협정체결회담에서 계속되었음이 떠올랐다. 그 비극적 반복이 앞으로도 나타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한반도와 아름다운 인연으로 이어질 요소들도 없지 않았다. 이 지역 초기 지배자인 오우치가가 스스로를 백제 임성태자 후손임을 강조했던 사실이나 담백미를 자랑하는 이곳 도자기가 조선도공의 손끝에서 빚어진 것은 한일간의 멋진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활용할 만한 요소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을 ’한국 독립운동가‘로 적어둔 설명문도 본격적으로 그 의미를 확장하여 동양평화론을 매개로 우애의 국제협력을 향한 미래전망을 부각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요소들은 최소한으로 언급되거나 대부분 은폐되어 있다. 일제의 조선병탄, 만주침략과 대동아전쟁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고 정한론의 역사가 남긴 부정적 유산에 대해서도 일언반구가 없다. 과거사는 기억되고 전승되지 않으면 잊혀지거나 왜곡된다는 점에서 이런 설명회피의 뒷면에 작동하는 고의성과 편협함에 내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귀국하는 비행기 속에서 우리의 역사인식 방식과 역사교육의 현주소를 생각했다. 식민사관의 극복과 주체적 역사인식을 강조하면서 남의 문제를 비판하고 지적하는데는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지만 스스로를 성찰하고 업그레이드하는 노력은 그에 미치지 못한 것 아닌가 자문한다. 21세기 세계 10대 경제대국이자 K-Pop의 역동성을 자랑하는 문화강국이면서 주체성과 배외성을 동일시하거나 전통과 혁신, 보수와 진보를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면서 위정척사나 반제투쟁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면도 없지 않다. 국가사 일변도의 정답찾기 교육이 역사를 살아가는 다양한 주체들의 자발성, 다원성, 개별성을 억압해 온 것도 향후 넘어서야 할 과제다. 앞으로 갈 길은 여전히 먼데 우리는 지금 어떤 준비와 노력을 하고 있는가 – 가벼운 여행이 끝나자 다시 무거운 질문들이 다가오고 있다.

2 Comments

  1. 박교수님의 글에 공감하며 이를 통해 역사적 이해의 모자란 곳을 채운 느낌입니다. 한일관계에 있어 일반적 한국인의 시각에 머물지 않고 객관적 역사적 시각을 전달해주시는 모습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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