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부 시대 무사 전통이 뚜렷한 도시 하기에 다소 어울리지 않은 유적이 하나 있다. 기독교 순교자 기념공원이다. 기독교 탄압이 혹독했던 시기, 나가사키의 우라카미(浦上)마을의 신도 3800명이 전국 각지로 유배되었고 그 중 약 300여 명이 하기로 보내졌다. 이들은 삼 년간 혹독한 고문과 굶주림 때문에 40 여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고난을 받았다. 그때의 박해와 인고의 흔적을 기려 세워진 것이 이 순교자 기념공원이다. 1605년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한 모리 번의 중신 부젠 수령 구마가야 모토나오의 비도 함께 서 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우리에도 잘 알려진 소설인데 일본의 기독교 박해가 그 배경이다. 수많은 신자들이 믿음을 지키려 박해를 받고 순교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 그 숭고한 죽음에도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허무감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작중의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를 뜻하는 후미에를 밟으면서 “밟아라. 아픔을 알기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나는 그 아픔을 알고 있다”는 예수의 음성을 듣는다. 비로소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요지의 소설인데 그 배경은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상당부분 반영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을 일본에 전파한 이들은 센고쿠 시대 일본과 무역을 하던 스페인,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 이전엔 ‘자비엘’로 불렸던 프란시스 하비에르(F. Xavier) 가 그 선구자였고 현재 야마구치에는 하비에르 기념성당이 있다. 그의 일본선교에 도움을 준 장본인이 하기 일대의 다이묘 오우치였다. 야마구치와 나가사키 일원의 다이묘들은 서양 세력과의 무역으로 이득을 챙기기 위해 가톨릭 전래를 허가했고 신자도 늘어났다. 다이묘 가운데서 신자가 된 자들도 여럿 있었는데 임진왜란때 조선에 온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은 후 지방의 다이묘들이 서양과 무역으로 세력을 키울 것을 우려하여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강력한 기독교 탄압정책으로 선회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1597년에 자행된 나가사키 기독교도들의 집단 처형이다. 도요토미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도 금교령을 내리고, 가톨릭 선교사들을 추방하거나 처형하는 조치를 취했다. 나가사키의 애환은 그 때부터 여러 차례 계속되어 메이지 유신 직후까지 이어졌다. 이로 인해 숨어 지내게 된 기독교인을 가쿠레 키리스탄이라 부른다.
1637년 키리시탄을 중심으로 막부의 지배에 저항하는 시마바라 난이 일어났다. 일본 최대의 농민봉기로 일컬어지는 이 사건은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혹독한 기독교 탄압의 계기가 되었다. 에도 막부는 ‘키리시탄은 정권을 엎으려는 반란분자’라고 생각하여 기독교인을 색출하는 악명높은 후미에를 만들어 철저한 박해를 가했다. 엔도 슈사쿠 [침묵]의 배경도 바로 이 시기인데 당시 순교한 많은 신자들이 후미에 앞에서 침묵하는 신에 대해 물었을 법한 주제를 다룬 것이다.
1858년 개항 이후 외국인에 한해 신앙 활동이 허가되었고, 나가사키에 오우라 천주당이 건립되었다. 성당에 구경왔던 사람들 가운데 카쿠레키리시탄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은 250여 년 전 순교한 바스챤의 예언을 이곳에서 확인하고자 했다. 1865년 4월 일부 카쿠레 키리시탄이 신부에게 “성모 마리아님의 성상은 어디 계시나요?”라고 물었고 신부가 안내해 주자 전원이 함께 기도를 했다. 오랜동안 숨겨왔던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 사건은 교회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로, ‘신자 발견’이라고 부른다.
2년 뒤인 1867년 우라카미 지역의 신도들이 불교식 장례를 거부함으로써 숨어 지내던 키리스탄의 존재가 드러났다. 비밀 교회당을 급습한 것을 시작으로 신도 68명이 일제히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외국 공사들이 강하게 항의하여 처형은 면했지만 대부분 하기, 후쿠야마 등지로 유배되었다. 이들은 노골적인 고문만 받지 않았을 뿐 물과 음식도 죽지 않을 정도로만 지급되었고 더위와 추위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식으로 가혹하게 대했기 때문에 유배된 3394명 중 무려 662명이 순교했다고 한다.
1873년 금교령이 폐지되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살아 남은 이들은 대부분 유배지에서 풀려났고 통상적인 형태의 가톨릭으로 원복하였다. 하지만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난지라 종교적 내용과 형식이 많이 변해서 오히려 “조상님의 종교는 그렇지 않다!”라며 가톨릭으로의 원복을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다. 성직자가 없는 상태에서 몇 안 되는 구전 전승만으로 종교를 유지해야 했으므로 실제 이들의 신앙은 매우 밀교적인 특성이 강했고 불교 등으로 위장되어 있었다. 또한 라틴어 기도문이 음차된 염불같은 오라쇼를 주문처럼 외우기도 해서 인류학자나 종교학자의 연구대상이 되기도 했다.
조선과 유사하면서도 희생자 솟자가 더 많았을 일본의 기독교 순교사를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한국은 그 순교자들의 희생 위에 기독교가 널리 받아들여졌고 크게 융성했지만 일본은 지금도 기독교인의 숫자가 매우 적다. 엔도 슈사쿠가 카쿠레 키리스탄의 발견을 주제로 새로운 소설을 쓴다면, 아니 오늘의 일본 기독교를 대상으로 소설을 쓴다면 제목을 무엇으로 했을지 궁금하다. 여전한 침묵? 깨어진 침묵? 이상한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