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추수와 감사

오늘이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주일이다.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주일이긴 하지만 사실 자연적 조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전통시대의 절기가 기독교와 결합된 문화적 현상이다. 농사든 목축이든 한 해의 소출을 거두어야 할 계절에 그 때까지 얻은 축복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반영되어 있다. 기독교 문명이 아닌 사회에도, 또 세속화가 현저히 진행된 21세기에도 가을의 추석이나 Thanksgiving Day를 기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릴 적 시골에서 이 계절엔 추수가 일상이었다. 들판에는 누런 곡식이 익고 그것을 베어 탈곡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국민학교에까지 ‘가정실습’이란 이름으로 며칠 쉬곤 했는데 추수에 바쁜 일손을 도우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농사를 짓던 대부분의 친구들은 이 시기에 크고 작은 일들을 하느라 바빴다. 나처럼 농사와는 무관한 아이들은 추수가 끝난 논에서 ‘이삭줍기’를 하곤 했다. 추수가 끝난 허허벌판 같은 논밭에서 하나 둘 주운 이삭들이 모여 가마니가 되는 모습을 보고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을 실감하기도 했었다.

추수를 상징하는 것은 주곡인 벼가 자란 논 만이 아니었다. 겨울을 대비하여 김장과 월동에 필요한 무, 배추, 고추를 비롯하여 밭농사의 마무리도 중요했다. 누런 호박도 거두어 들이고 타작이 끝난 작물의 잎이나 줄기로 자반을 준비하기도 했다. 내게는 나무에 열린 과일들을 따던 기억이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마을 곳곳에 감나무들이 있어 빨간 감들이 달려 익어가는 가을 풍치를 더하곤 했는데 대부분 이 계절에 따서 보관하거나 곶감으로 만들게 된다. 높은 곳의 일부 감은 까치밥으로 남겨두었다. 그래서인가 지금도 상점에서 감을 보면 다른 어떤 과일보다 ‘가을’을 떠올리게 된다.

추수를 하면 감사가 따르게 마련이었던 것 같다. 흉년도 있고 생각보다 소출이 적은 경우도 태반이지만 추수하는 그 시간만은 풍요롭고 뿌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감사의 대상은 ‘자연’이나 ‘신’을 향하게 되니 바울의 표현대로 ‘알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었다고 할 것이다. 농부의 땀과 수고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비바람 햇볕의 도움이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농부들로서 추수와 감사가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를 따라 비가 내리고 햇볓이 쬐어 이루어진 결실이라는 것이 너무도 절실하여 표하게 되는 감사를 폄하할 일은 아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보면 우주적 절대자, 삼라만상의 창조주에 대한 감사라 해도 무방할 일이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된 현대사회에서 추수는 더 이상 자연과 계절에 연동되지 않는다. 월급형태의 소득이 주어지고 주식시장은 거의 실시간으로 이익이 달라진다. 더구나 학생이나 청소년, 퇴직한 세대나 실직자들은 ‘추수’의 감격을 느낄 새도 없다. 그러다보니 추수경험과 감사행위는 단절되었다. 긍정적으로 보면 감사가 어느 때든지 필요한 일상이 되었다 볼 수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더이상 감사를 절감할 절기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자연과 환경, 우주적인 섭리에 대한 생각을 할 기회가 사라진 셈이다. 햇빛과 바람, 비와 온도 대신 직장과 가정, 국가와 사회를 생각하게 된 것이 근대화이고 합리화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 댓가로 소중한 것을 잃은 셈이다.

자나간 내 생활을 되돌아보면 이런 사회적 변화가 내 일생 속에 고스란히 재현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의식 속에서 감사하는 태도가 옅어진 것은 물론이고 그나마 사람이나 사회적 조건에 대한 것이었을 뿐 자연과 우주에까지 시선이 확장될 겨를이 없었다. 아니 어릴적에 지녔던 순수한 추수에의 감사도 ‘계몽’의 이름 속에서 사라졌다. 평소 감사한다는 생각 없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감사하자는 덕담도 적지 않이 했다. 하지만 세속적 잣대와 가치로 여러가지 염려와 후회들을 무시로 겪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총체적으로 감사의 마음, 추수의 기쁨이 사라진 탓일텐데 신앙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건강상으로도 넘어서야 할 내적 문제다.

스펄전 목사님의 ‘자아가 내게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자아에게 선포하라’는 메시지가 마음에 와 닿는다. 자아를 나와 등치시키면서 자아에 이끌려 다니는 것은 결국 나를 비주체적인 존재로 만들 우려가 크다. 인간은 본명 사회학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실존적인 단독자이기도 하다. 내 자아가 나의 중요한 실체이지만 그것이 나의 전부일 수는 없다. 미드의 표현대로 ‘me’ 를 넘어서는 ‘I’에 대한 감각, 그 존재론적 자의식을 확인하고 강화시키는 것은 인생 후반에서 더더욱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그런 마음으로 종종 접하던 감사 관련 성구들을 되새겨보는 추수감사주일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전 5:16~18)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 ,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시 95:2~3),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골 4:2) ,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역상 16:34),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시 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