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큐슈지방과 서일본 일대는 일찍부터 한반도와 접촉이 많았다. 애매한 이웃 사이가 종종 그러하듯 선린교린의 활동도 있고 원한과 대립의 역사도 있어 그 관계는 양면적이다. 시모노세키와 하기는 특히 그런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는 곳이다.
시모노세키는 조선의 앞선 문물을 일본에 전수하는 뱃길이 닿았던 항구다. 현재 시모노세키에는 조선통신사 내왕을 기념하는 비가 서 있다. 한반도에서 일본에 파견된 사신의 존재는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하고 그 명칭도 통신사 이외에 회례사, 보빙사, 경차관 등이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이전 통신사는 동등한 국가간의 외교 사절과 비슷해서 왜구의 단속 요청, 대장경의 증정 등을 논했고 피차 존중의 예로 대했다. 1590년 일본의 교토에 파견된 통신사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된 일본의 정세와 조선 침공 가능성을 알아볼 목적으로 파견되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시모노세키는 또한 1894년 청일전쟁을 마무리하는 쳥일강화회담이 개최된 곳으로 현재도 그 기념관이 있다.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두 나라가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인 어처구니 없는 전쟁의 마무리 장소였다. 전통 료칸인 슌판로에서 1895년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가 양국 전권대사로 만나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도 불리는 이 조약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한다’는 것이 명문화되었고 청의 한반도 종주권이 부정되었다. 실제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독립국가로서의 도약을 시도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뒷받침하는 빌미로 작용해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조선으로의 영향력을 급격히 키워나갔다.
1905년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에 ‘관부연락선’이 취항하면서 인적 물적 왕래의 거점으로 발전했다. 부산역과 시모노세키역을 통해 경성과 도쿄까지 철도로 이어져 일본의 대륙진출에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했다. 한반도에서는 유학생, 노동자 들이 주로 이용했고 일본에서는 농업이민자, 대륙진출의 야망을 가진 자들이 탑승했다.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많아 소설과 연극, 영화 등의 소재로 종종 등장했고 조선 최초의 성악가 윤심덕이 정부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진 일화는 유명하다. 해방 직후에는 많은 재일조선인의 귀국편으로, 또 조선거주 일본인의 환국편으로 이용되었다. 오랫동안 폐쇄되어 있다가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1970년 부관페리가 취항하여 노선이 재개되었다. 지금은 한일간 관광객과 중소상인의 편리한 교통편으로 자리잡았다.
하기도 초기엔 한반도와 우호적인 지역이었다. 이곳의 원 지배자였던 오우치(大內)가는 7세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26대 성왕(일본에서는 성명왕이라고 한다)의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다이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들과의 교류가 기록되어 있는데 대내전(大內殿)으로 지칭될 정도로 상호 예를 갖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도 그 후손 가운데 백제 및 한반도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오우치가가 가신인 모리 모토나리에 의해 멸명한 이후 하기와 조선의 관계는 악연이라 할 만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모토니라의 손자이자 후계자인 모리 데루모토(毛利 輝元 1553년~1625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112만석에 대한 영유권을 공인받았다. 데루모토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에 3만병력을 이끌고 출동했고 그의 숙부인 히데모토는 정유재란때 가토 기요마사군과 합세해 조명연합군과 싸웠다. 그 공으로 1597년 데루모토는 도요토미 정권을 받치는 5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이 되었다. 전국시대에 모리가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편을 들어 도쿠카와와 대립했다가 패하여 250년간 중앙 정계로부터 철저히 배제당한 채 지방의 소영주로만 존속했다.
하기와 한반도의 악연은 19세기 말 요시다 쇼인이 제창한 정한론에 의해 심화되고 강화되었다. 요시다 쇼인은 서양을 이기려면 서양을 알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페리의 흑선으로 밀항을 도모하려 한 인물이다. 하기 지역에 유폐당한 상태에서 천황 중심의 정치변혁과 개혁구상을 다듬어나갔고 제자들을 양성했다. 그는 서양 함대와 무력에 굴복했던 일본의 치욕을 이웃 나라 조선에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보상받으려는 정한론을 강력하게 주창했다. 강자에 대한 숭배와 약자에 대한 지배라는 이중적 태도가 독특하게 결합된 정치구상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치를 좌우했던 조슈 출신 정치인들은 모두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다. ‘조슈 3존’이라 불리는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등은 실제로 조선 침략의 주역들로 정한론을 실행에 옮겼다.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정부의 초대총리이자 이후 네 번이나 총리를 역임한 일본근대의 최고 정치인의 한명이다. 조선통감부의 초대통감으로 고종의 강제선양을 강요하고 강제병탄의 길을 닦은 인물이어서 한국으로서는 원한이 깊은 대상이다. 1909년 의병대장 안중근에 의해 하얼빈에서 포살되었지만 일본에서는 근대 최고의 영웅처럼 평가되고 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토 히로부미의 오른팔로 불리기도 한 인물이다. 1863년, 이토 히로부미 등과 함께 영국 유학을 떠난 이후 적극적인 개국론자로 바뀌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 많은 활동을 했다. 1876년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체결에서 일본측 협상 대표였고, 갑신정변 후에는 조선 주재 일본 공사로 장기간 재임했다. 민비 시해가 있었던 1895년 을미사변 당시 공사는 미우라였지만 이 사건의 기획과 실행에 이노우에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신생 일본 육군을 독일식의 근대 육군으로 변모시켜 일본 육군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타카스기 신사쿠의 기병대 창설에 참여했고 징병제의 도입과 육군성과 해군성의 설치 등 군제 개혁을 주도했다. 1894년 청일전쟁 때 조선 주둔 제1군사령관이었고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공작 작위를 받았다. 독일로부터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을 도입하여 주권선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 이익선 안에 조선과 대만, 사할린을 포함시킨 장본인이었다. 강점 이후에는 조선과 대만이 주권선으로 편입되고 이익선은 만주와 필리핀으로 확장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조선으로 온 오시마 요시마사도 하기 출신이다. 당시 그는 경복궁을 점거하고 고종을 겁박하여 청일전쟁 발발의 빌미를 만들었고 농민군 토벌 명복으로 대민군사작전도 벌였다. 야마구치 현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미나미 고시로 문서는 동학 농민군에 관한 기록들이다. 이 때의 공으로 남작직을 수여받았으며 러일전쟁시 육군 대장으로 진급되어 관동지역의 총독이 되었고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포살한 안중근을 형장에 세우기도 했다. 일본 제 90, 96-98대 총리를 역임한 아베 신조의 친외조부이자 아베가 가장 존경한다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기의 인물들이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구상한 개혁과 부국강병노선은 일본으로선 근대화와 산업화의 중요한 계기였지만 조선으로의 침략정책과 깊이 맞물려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에까지, 최근으로 오면 아베 신조의 우경화 노선에까지 그 맥이 이어져 있어서 지나간 한 시대의 과거로 치부하기도 어렵다.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한일 역사논쟁의 한 거대한 뿌리가 이곳 조슈에 깊숙히 내려져 있는 셈인데 여행을 통해서 이런 기억을 단순히 반복하고 싶진 않다. 21세기 시공간을 반영하는 새로운 시야, 국가단위 해석을 넘어서는 보편적 전망을 발견할 가능성이 있을까? 역사적 악연은 어떻게 단절할 수 있고 舊怨은 어디서 망각될 수 있을까? 답이 없을 듯 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