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승현 차관은 이틀의 회의를 종료하면서 ‘열린 시각’과 ‘집합지성’을 핵심적 교훈으로 언급했다. 열린 시각이란 현실의 다층적 차원을 균형있게 그리고 깊이있게 다루는 역량을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사고가 유연해져야 함은 물론이고 현실의 복합성을 인지하는 실력이 더해져야 할 것이다. 특정한 개인이나 정파의 목소리보다 사회 각 영역의 지혜가 결합하여 고급한 집합지성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중요한 것은 그 당연한 귀결이다. 나는 열린 시각을 서로 다른 관점의 균형이라는 방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데 내가 특히 주목했던 세가지 차원을 중심으로 개방적이고 복합적인 사고의 균형을 생각해본다.
첫째는 과거의 미래의 균형이다. 흔히들 독일에게 통일은 과거사가 되었고 한국의 통일은 미래적 과제라고 말한다. 하지만 역사의 긴 과정으로 보면 통일이라는 사건도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어 있는 장기적 대전환의 한 부분이다. 독일의 이번 발제에서 ‘전환’이란 화두가 자주 등장한 것이나 분단시대의 긴 트라우마를 언급한 것은 통일을 지난 과거사로 볼 수 없으며 미래로의 전환과 결합해서 파악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둘리히 장관이 말했듯이 이 프로세스는 분단에서 통일로의 전환 뿐 아니라 과거에서 미래로의 전환까지 포함한다. 마르텐 역시 분단시기와 통일시기를 사람들의 생애사 속에서 연속적으로 포착할 것을 강조했다.
둘째는 민족사와 지역사의 균형이다. 독일측은 분단해소와 통일과정이 결코 독일에 한정된 사안이 아니었고 또 그렇게 해석되어선 안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동독의 인권사항도 동서독 교류협력도 민족사의 차원을 넘어서 보편사, 유럽사의 맥락을 잃지 않으려는 시각을 드러냈다. 이번 회의에서는 논의되지 않은 헬싱키 프로세스와 유럽통합이란 지향 속에서만 독일통일의 쾌거가 가능했다는 교훈을 새삼 확인한다. 우리 맥락에서는 한반도적 관점과 동북아 지정학이 함께 가야 한다는 말이겠는데 민족사나 국가사 못지 않게 세계사의 흐름과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대북정책이 주변국외교와 긴밀히 연계되어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셋째는 정치경제와 사회문화의 균형이다. 분단과 통일의 시각은 늘 정치적 시각과 경제적 고려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것이 현실이기도 하고 정치적 판단과 경제적 통합이 가장 중요한 동력임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독일측은 유난히 사회적인 것, 개인적인 생애경험을 중시할 필요를 강조했다. 변화를 감당하는 시민들이 어떤 경험과 생각을 하게 되는지, 자신의 생애 속에서 소중히 여기던 경력과 경험들을 새로운 체제전환과 어떻게 연결시킬지가 중요하며, 그런 의미에서 통일은 국가적 의제임과 동시에 시민사회적 쟁점이기도 하다. 민주주의 원리가 강조되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
내 개인적으로는 이런 복합적 시각과 열린 자세를 잘 드러낸 것이 독일의 미래센터 기획이 아닌가 싶다. 2022년 연방정부와 연방의회의 결의를 거쳐 추진되고 있는 이 센터는 10년의 건립기간을 두고 과거와 미래, 독일과 유럽, 서독과 동독을 함께 묶는 새로운 비전을 구축하겠다는 비전을 표방한다. 이 작업을 책임진 미하엘 마르텐 과장은 발제에서 현재 추진하는 미래센터가 과거경험을 정형화하고 박제화한 박물관이 아니라,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시각과 경험들이 소통하고 성찰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특히 정부나 특정 집단이 컨텐츠를 정형화하거나 공식화하지 않도록 사회 곳곳에 개인별로 상이한 경험과 기억을 존중하는 기획이 되도록 할 것임을 강조했다.
‘역사는 (동서독인, 또 전 유럽인) 이 함께 이루어낸 것’임을 보여주면서 기억문화 내부의 다원적인 목소리를 용인하고 서로 다른 기억들이 소통되게 만드는 것을 중시할 것을 강조했다. 일방적이고 단순화된 공식기억, 기억의 독점으로 개개인의 생애사가 부정당할 때 포퓰리스트의 선동에 취약해진다는 것을 언급하는데서 나는 정책담당자가 웬만한 인문사회학자 이상의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경험과 기대, 기억과 평가에 상이함이 크고 모순적인 대립이 존재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집합적이고 문화적인 역량이 한국의 통일담론과 정책구상에도 확대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