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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합, 전환, 거버넌스

독일측 참가자의 발제에서 ‘전환’이란 개념이 부각되고 있는 모습이 흥미로왔다. 통일이나 통합 대신 전환이란 말을 사용하는 데서 ‘평화혁명 35주년 기본법 75주년’을 맞고 있는 오늘 독일의 지성적 흐름을 느껴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전환이란 말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탈냉전 후 사회주의 체제의 시장경제화를 논의할 때 ‘체제전환’이란 개념이 널리 사용되었고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인터넷의 일상화와 정보화를 포함하는 ‘디지털 전환’이란 말이 종종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독일측 발제에서는 이 말을 통해 통일 이후 독일사회가 겪는 다차원적 변화를 종합적으로 다루려는 새로운 의도가 읽혀지는 듯 해서 흥미로왔다.

독일은 통일보다 통합이란 말을 선호했었다. 통일이란 특정 시기의 정치적 이벤트로 보지 않고 긴 역사적 변화, 진행중인 프로세스로 파악하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이제 전환이란 말을 내세운 데는 과거 30년의 역사경험에 한정하지 않고 미래지향적 변화를 포함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리히 작센주 장관은 구동독의 시장경제화, 제도통합 등의 과제에 더하여 디지털화, 기후변화, 탈탄소화 등 21세기적 과제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최근 정체성을 둘러싼 혐오정치와 종족주의가 대두하는 위험도 단지 통일의 후유증, 통합의 미흡함으로 간주되기보다 새로운 사회관계 형성에서 경험하는 미래에의 불안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과거의 경험과 유산에 한정되지 않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노력과 숙제를 고민하려는 의도가 ‘전환’이라는 개념 뒤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종합토론에서 독일측 위원 세 분이 한반도 통일에 대해 조언을 했는데 나는 ‘전환’이란 말과 ‘복합 거버넌스’라는 두 측면에서 이들의 공통된 관점을 읽을 수 있었다. 통일은 결코 분단국가가 이전상태로 되돌아가는 회복정치가 아니며 다양한 안팎의 변수가 뒤엉키는 역동적 과정인만큼 다면적 전환 프로세스를 감당할 역량구축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장기적 시야가 필요하고 모순적이고 예기치 않은 요소들을 다룰 총체적 거버넌스가 중요하다는 말일텐데 사실 그것이 선진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급한 문화지식적 소프트 파워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먼저 슈납파우프 박사가 말한 것은 “현실은 준비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통일의 역동적 과정을 지켜보며 실무를 담당해 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메시지였으리라 생각되는데 그는 우연성, 의외성, 불확실성을 감당하기 위한 조직과 거버넌스를 특히 강조했다. 역사가 격동의 물결에 휩쓸릴 때 그 흐름을 읽으면서도 방향을 조정할 유연한 조율역량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것이 아니다. 통일이라는 매우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다원적이고 모순적인 상황을 관리하고 통제하며 향도하는 복합적 거버넌스가 필수적이리라.

브레멘 대학 총장이자 경제학자로서 귄터 박사는 체제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날 것을 제안했다. 체제가 잘못되어도 그 속에서 활동하는 사람과 특정 영역의 경험은 소중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으며 인간적 상호존중과 신뢰구축이 효율일변도 정책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녀는 발제에서도 동독의 과학기술수준이 결코 형편없는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하고 통일과정에서 그 역량과 경험이 무시당한 것의 후유증이 매우 컸음을 언급했다. 북한의 체제비판이나 남북한 경제격차를 다룸에 있어서도 냉정한 현실인식에 더하여 체제론이나 이념적 차원으로 환원되기 어려운 인간과 사회를 중시하는 연구자적 시각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작센주 장관이기도 한 둘리히 위원은 통일이 목표가 아닌 과정, 심지어 중간단계일 수 있음을 인식할 것을 주문했다. 지나보면 통일은 긴 전환과 변화의 한 지점이었고 통일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도 아닌 것이 금방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는 통일과정이 자칫 정치적 승자와 패자로 나뉘어지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성을 언급했는데 그런 감정은 일단 형성되면 매우 오래 부정적인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는 독일의 사례도 단지 참고사항일 뿐임을 강조하고 너무 독일정책을 모델화할 필요가 없음을 언급했다. 결과론적 해석이나 체제 중심적 접근보다 인간적 사회적 측면이 강조되어야 하며 특히 청년세대의 미래와 긍정적 전망이 통일과정과 연계될 수 있어야 함을 지적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이미 통일을 달성한 독일사회에서나 가능한 여유있는 시각이라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런 독일의 논의에 대해 부럽다는 인상을 언급한 한국측 위원들도 여럿이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 전반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타산지석으로서의 의미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단일목표지향형 사고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 통일은 남북한과 동북아, 세계체제의 변화와 상호연동되는 복합적 과정이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리, 정체성 등 삶의 전 영역에 걸친 재조정을 요구하는 대전환이다. 이런 과제들의 선후와 완급을 조율하고 관리하는 복합적 거버넌스가 통일역량의 요체인 바, 그것은 우리 사회의 총체적 소프트파워와 지정학적 환경이 함께 작용하는 사안이다. 통일이란 쟁점이 국내정치용으로 이용되거나 국제정치의 명분으로 활용되기 쉬운 우리로서는 진지하게 유념할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독일의 경험을 박제화, 정형화하지 않으먄서 현재진행형 교훈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리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