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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수관계와 2국가론

북한이 남북한의 동질성과 민족통일론을 부정하고 적대적 2국가론을 표방한 이래 남북관계의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가 우리 사회의 큰 쟁점이 되었다. 적대적이란 말에 담긴 군사적 위협도 문제지만 ‘통일을 향한 잠정적 특수관계’라는 오랜 합의가 더이상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기본원칙으로서의 힘을 잃게 되는데서 오는 문제가 만만치 않다. 한국 사회 내에서도 청년층 사이에서 통일을 추구하기보다 두 국가로 공존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확산되고 있다. 교류협력을 기초로 점진적인 통일과정을 상정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고수할 것이냐 새로운 통일방안을 마련할 것이냐도 이런 맥락에서 따라오는 현안이다.

분단시기 동독이 2국가론을 내세웠고 동서독 기본조약이 우리 기본합의서의 모델이었다는 점에서 기본조약과 통일의 관계를 다룬 안드레아 행어의 발제가 주목을 끌었다. 건강문제로 참여하지 못한 그의 글은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기본조약 체결로 동서독 관계가 크게 개선되었다. 2) 서독은 통일조항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통일정책은 뚜렷하지 않았고 실질적 2국가상태가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3) 1990년의 통일과정은 예상하거나 기획한 것이 아닌 ‘즉흥적’ 사건이었다. 기본조약을 체결한 후 에곤 바는 “아무 관계가 아닌 것에서 나쁜 관계로 이행했는데 이것은 진전이다”라고 했는데 이 ‘진전’이란 말 속에 통일의 미래가 담겨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기본조약 체결 이후 동서독간에는 페터 벤더의 말처럼 “서독은 승인없는 교류만을 원했고 동독은 교류없는 승인만을 원”하는 동상이몽이 오래 지속되었다. 통일은 동독에서 일어난 ‘평화혁명’이 결정적인 변수였고 그런 점에서 즉흥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 독일통일과 기본조약의 연관성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라는 내 질문에 대해 행어 대신 발표를 맡았던 슈납파우프 박사는 여러 요인 중 하나임은 인정하면서도 “통일은 통일정책의 산물이 아니었다” 라는 말을 덧붙였다. 2023년 베를린에서 개최된 12차 회의에서 그는 ‘포괄적 조약체계 내 구성요소로서의 기본조약’이란 글을 발제했었다. 그의 논지는 동서독 기본조약은 다른 여러 조약들, 즉 서독이 추진한 70년 모스크바 조약과 바르샤바조약, 그리고 73년의 프라하 조약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기본조약이 동서독을 조약관계로 변화시켰지만 통일이란 목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는 점도 강조했다. 연방헌법재판소는 기본조약이 분단조약에 해당되지 않으며 ‘통일명제에 따라 독일 민족이 평화와 자유 아래 국가통일을 다시 이룰 수 있도록 총력을 다할 것’ 이라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했음을 들어 통일조항의 유지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었다.

언제나 진지하고 깊은 생각을 피력했던 분이어서 나로서는 계속 생각할 화두 하나를 얻은 느낌이었다. 작년 그의 발제문을 다시 살펴보면서 기본조약과 통일의 관련성을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는 기본조약에 의해 동서독 관계에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정작 기본조약 1조가 표방한 ‘정상적이며 상호우호적인 이웃관계’ 수립이라는 목표는 전혀 구현되지 못한 희망사항으로 남아있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의 발제문 행간에서 기본조약이 수행한 역할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통일은 동서독 관계의 개선을 포함하되 그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헬싱키 프로세스와 유럽통합, 탈냉전의 전과정과 연관된 흐름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라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통일은 통일정책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말은 동서독 관계개선이 통일의 충분조건일 수 없다는 말로도 이해될 수 있겠다.

김천식 원장은 변화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통일의 당위성은 변함이 없으며 반드시 추구해야 할 민족적 과제임을 강조했다. 오랜 단일민족적 배경과 강한 통일의지가 중요함을 지적하고 북한의 2국가론을 반민족적, 반통일적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대해서는 그 기본정신을 수용하면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강조했다. 현재 국면에서 어떤 새로운 대안이나 원칙이 필요할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 듯 보였다. 김병연 교수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기본틀을 유지하면서 그 중간단계로 ‘경제공동체’를 설정할 것을 제안했다. 남북이 경제영역에서 같은 공동체로서의 통합을 이루는 것은 통일로 이어지기 위한 필수적 전제가 아닐까 하는 그의 주장은 깊이 숙고해볼 쟁점이 아닌가 싶다.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실질적 2국가 상태로의 이행을 당연시하는 국내의 여론에 대응하는 새로운 통일담론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가 만만치 않은 숙제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통일이 국내외 수많은 예기치 못한 사건들과 뒤엉키면서 진행되어야 하는 과정임을 고려하면 통일에 대한 분명한 주체적 의지, 민족적 열정을 재확인하는 것 못지 않게 21세기 지정학의 복잡한 흐름도 반영하는 총체적 비전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 세션을 거치면서 두 가지 공부거리를 내 스스로 던지게 되었다. 1) 우리는 너무 통일을 남북관계 중심으로만 사고하는 편향을 지니고 있는 것 아닐까? 한 때 남북기본합의서나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를 통일로의 대장정인 듯 믿었던 과잉기대가 우리 사회 일각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을 남북간 합의만으로 성사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발상도 마찬가지다. 2) 남북간에 실질적 2국가상태가 강화되는 것과 통일을 추구하는 노력은 반드시 상충하는 것일까?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은 당연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지만 별개의 주권체로서 남북간 국제법적 관계가 진전되는 것이 반드시 영구분단이나 반통일로 이어질 필연성은 없다는 사실을 독일의 사례가 보여주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다층적인 변화가 역동적 결과로 이어지는 역사의 미묘한 공간을 포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시기를 맞이한 셈이다.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가는 노력 속에 이런 섬세함이 담겨지기를 기대해본다.